"짐이 가볍기를 기원하지 마라. 등이 더 튼튼해지길 기원하라."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깊이 생각해보기

아직도 돈과 행복의 크기가 같다고 생각하는가? -행복의 역설

노란섬 2021. 4. 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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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그 국민의 하위 계층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경향도 있다.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 Thomas Robert Malthus

확실히 국가의 부가 증가한다면, 개개인의 부 또한 증가한다. 특히 부를 원하는 하위 계층들은 국가의 부에 따라, 그들의 행복이 증가한다. 먹고싶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게되고, 자신의 집을 갖게되고, 자식을 키울 여유도 생기게 된다. 또한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용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위 계층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먹고싶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계층, 자신의 집을 이미 갖고 있는 계층, 자식을 이미 키우고 있는 계층, 이미 다양한 문화를 접해본 계층은 과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최근 많은 연예인들이나 아이돌, 경제적인 걱정 없이 건물 한 채 정도는 갖고있는 흔히 중상위 계층이 많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과 행복은 더이상 비례 관계가 아님을 알려주는 듯 하다. 이것을 '행복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약하다는 것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다람쥐 쳇바퀴' 비유로 설명된다.

소득의 증가는 뭔가 다른 것의 증가를 불러오겠지만 (부, 명예, 우쭐거림), 마치 다람쥐 쳇바퀴가 그렇듯이 사람이 아무리 달려도 쳇바퀴는 반대 방향으로 돌기 때문에 결국에는 제자리걸음이다. 물질적 조건의 향상은 동일한 수준의 만족을 유지하기 위해 더 강렬한 쾌감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을 유인한다. 소득이 200만원일 때는 10만원짜리 시계에 쾌감을 느꼈지만, 소득이 두배로 뛴다면, 100만원 짜리 시계를 구매해야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해야 소득이 증가하기 전과 동일한 수준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관계성

현대는 예전과의 삶과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특히 시장문화가 주를 이뤘던 한국 사회는 관계성, 네트워크가 쉴 틈 없이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일주일에 한번 큰 장을 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네트워크를 쌓아갔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마주하지 않는 거래가 주로 이루어진다. 지금은 마트에 가거나, 옷가게에 가는 것 대신, 휴대폰으로 온라인 쇼핑을 더 선호하는 시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관계의 질은 떨어진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및 중세 스콜라 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 학파의 인류학적 기본 가정은 좋은 삶 또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비도구적 대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도구적 대인 관계라는 것은 어떠한 용도에 의한, 목적에 의한 관계가 아님을 말한다.

 

관계 VS 돈

소득 증가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질을 희생하면서 이루어질 때, 더 부유해졌지만 행복은 줄어든 것을 보게되는데 이는 특히 1인당 국민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고 나면 그렇다.

 

예를들어, 월 200만원 을 버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갓 독립을 했고, 아직 자가용을 사기 위해 빌린 대출금도 값지 못했다. 집은 간신히 작년에 전세로 구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집들이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하필이면 집들이날에 회사일이 생겼다. 그 날에 회사에 나가면 4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상황에서 그에게 집들이가 행복감을 줄 것인가, 40만원이 행복감을 줄 것인가?

 

반대로, 월 500을 만원을 버는 사람은 자기의 차와 집도 있다. 그러한 그에게는 오랜만에 친구들이 찾아온다고 했을 때, 일을 포기하고 만남을 가질 확률이 더 높다. 만약 그가 친구들과의 관계를 희생하고 (행복은 줄어들고), 돈을 더 번다는 것(더 부유해진다는 것)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즉, 더 많이 번다는 것, 일정 수준의 소득이 넘어선 후에 고소득이란 그 자체로서 행복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은 '쾌락에 대한 적응'과 사회적 비교 때문에 화폐에 대한 열망이 실제 주변 여건들을 바탕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결과 가정생활과 건강을 희생하면서 화폐적 목표들을 추구하는 데 과도한 양의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주관적인 행복은 기대했던 수준에 비해 감소한다. 가정생활과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시간을 배정하면 주관적인 행복이 분명히 늘어날 것인데도 말이다." -Easterlin. 2004, p.52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

현대 시장 경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키워나간다는 것이 매우 많은 비용이 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미있는 관계를 위해 서로 시간을 내어 만남을 갖고, 추억을 쌓고, 근사한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 많이 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현재 이러한 관계로부터 얻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대용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온라인 방송 등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많아졌는가? 이곳은 휴대폰과 인터넷만 있다면, 언제든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심지어 국내 뿐 아니라 해외까지 말이다. 이러한 신기술들은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상처 없이, 행복 또는 축복을 약속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인 것처럼 우리에게 환상감을 심어준다. 확실히 우리가 이러한 신기술들을 이용하면서 실제적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비해 위험 부담이 줄어든다. 특히 가상의 공간, 게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친구 차단이나 친구 삭제를 해버리면 그만 아닌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단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현대인의 인간상은 다음과 같은 끔찍한 탄성으로 요약된다. 

"타인은 지옥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 Huis clos>

 

행복한 노예

"행복해지는 것이 가치 있는 성취라는 점, 그리고 삶의 수준을 평가할 때 행복이 가치 있는 목표, 또는 가치 있는 목표들의 집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쉽게 확신할 수 있다. 매우 불우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가난하고 착취당하며 과도한 노동과 병에 시달리는 등의 사회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종교, 정치 선전, 또는 문화적 압력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만족하게 받아들이게 된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가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잘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비록 그가 사는 삶이 궁핍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높은 수준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삶의 수준은 그 사람이 사는 삶의 특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아마르티아 센의 '행복한 노예'

옛날에 전쟁의 폐해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고된 노동과 착취를 당하면서도 개인적인 진실한 종교심이 있다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가 아무런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 

 

매일 낙심한 듯한 표정을 하고, 기운이 없고, 어깨가 축 처져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행복한가?"하고 물었을 때, 그가 "저는 행복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는 자기표현일 수 있는가?

 

진정한 행복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거야. 아무 야망이 없으면서도 꼭 이 세상 야망이란 야망은 다 품은 것처럼 죽어라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되 그들을 사랑하는 것. 성탄절 날 실컷 먹고 진탕 마신 다음 일체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별은 머리 위에, 뭍은 왼쪽에, 그리고 바다는 오른쪽에 두고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러다가 삶이 가슴속에서 마지막 위업이 이룩했다는 것을, 즉 삶이 한 편의 동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것." -그리스인 조르바

이 구절은 왠지모를 감동을 준다.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되 그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목적 없이 사랑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채 바라는 아가페적 사랑이 아닐까 싶다.

 

관계에 관해 계속 강조했지만, 이 관계라는 것은 무조건 사람과의 관계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일 수 있고, 자신의 반려견과의 애틋한 관계일 수 있다. 그 어떠한 종류의 관계든,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무언가,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 행복하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외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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