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et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리즈로 힙합은 점점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쇼미더머니를 본격적으로 알기 시작했던 것은 시리즈 4부터인데, 이 당시에 '언프리티 랩스타'라는 프로그램도 꽤나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안다(졸리브이와 타이미 디스전 때문에 보게 됨). 사실 나는 이런 프로그램을 주변 사람들에 의해, 또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알게되었는데, 서로 디스를 하고 까내리며, 물질적 부를 강조하는 듯한 가사에 눈살을 찌뿌리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종의 쾌감도 있었다. 누군가를 디스하는 것이 무서운...개복치같은 나에게는 대리만족도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쾌감이 생겼다.
이런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실시간 검색어에 자주 보이곤 한다. 물론 범법을 저질렀다는 기사, 논란에 대한 기사 등이 많이 보이기도 한다. 광고와 예능에도 힙합 아티스트들이 많이 출연한다. SNS에서도 힙합 아티스트들을 팔로우하는 대중들이 다른 장르에 비해 많아졌고, 힙합 아티스트들도 대중과의 소통에 매우 적극적이다.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건 힙합 아티스트들이 되게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인기가 식지 않는 것이 아닐까?
힙합하면 나는 랩부터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랩은 힙합의 하위 범주다. 힙합의 기원은 흑인들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대부분 알 것이다. 1970년대 당시 아직까지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했던 미국 사회에서 소수의 흑인들은 랩으로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알렸고, 그림은 그라피티로, 춤은 비보잉으로 사회에 자신의 이야기를 알렸다. 백인들의 예술은 흑인들이 범접할 수 없었기에, 흑인들은 그들만의 예술을 향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로는 힙합을 Sub-culture (서브 컬쳐)로 분류한다. 즉, 어떤 사회에 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여기서는 백인우월주위에 사는 흑인) 자신들을 대다수와 다르게 표현하며 다르게 살아가는 문화와 방식을 뜻한다. 대다수인 백인들과 다르게 흑인들은 소수로서 자신들만에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힙합이란 장르의 탄생 아래 깔려있는 사상이다.
그들만의 랩, 그라피티, 비보잉문화는 힙합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고, 그 배경에는 디제잉을 빼놓을 수 없다.
디제잉 (DJing)
차별받는 문화 속에서 1970년대 당시 흑인들은 디스코 음악을 많이 향유했다. 거리 한 구역을 통제하여 디스코 음악을 즐긴 것이 블락 (Block) 파티고, 집 안에서 디스코 음악을 즐기는 하우스 (House) 파티 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주로 디스코 음악을 즐겼다.
1973년, 뉴욕시 북동쪽에 주택공업지역인 Bronx에서는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디스코 음악을 즐겼고, 그곳에서 디스코 음악을 책임졌던 아티스트는 자메이카 출신 DJ Kool herk였다. 자메이카 출신 미국 이민자인 그는 자신의 본토 음악인 레게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지만,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던 중 레코드판 두 장을 이용해 곡 전체가 아닌 반주만 나오는 브레이크 구간만을 계속 반복되는 루프 형식으로 이어서 틀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브레이크 구간에 열광하며 그의 음악에 리듬을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게 된 춤이 브레이크댄스이고, 음악에 맞춰 운율을 붙여 뱉은 말이 랩이 된 것이다.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그의 디제잉 기법은 다른 DJ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게 되고, 이후 클럽 문화가 계속 발전해가면서 디제잉이 힙합 요소로 포함되었다.
랩 (Rap)
DJ들은 리듬에 맞춰 브레이크 구간에서 "브레이크 구간 나갑니다~준비하십쇼!"라는 느낌으로 흥을 돋구는 짧은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노래를 재생시키는 동시에 마이크를 잡는 건 어렵다. DJ들은 자신들이 준비해 온 선곡에 집중해야하니 옆에 친구를 불러 자기 대신 구호를 외치게 했고, 이것이 힙합에서 빠질 수 없는 MC의 등장배경이다. MC들은 자기들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중독성 있는 문장 구호를 만들었고, 이런 짧은 문장이 가사가 되어 현재의 랩 형태에 가까워졌다. 클럽 안의 사람들은 MC의 퍼포먼스에 점점 흥미를 갖고 열광하게 되었다.
비보잉 (B boying)
비보잉을 떠올리면 화려한 동작, 팽이처럼 빙빙 도는 모습, 카포에라같은 유연한 몸의 사용이 떠오른다. DJ의 브레이크 구간에 맞춰 갑자기 튀어나와 그들의 흥을 춤으로 표현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이런 사람을 DJ Kool herk은 Break Boy라 불렀다. (줄여서 B-boy가 된 것). 여자는 B-girl 이라고 불렀다. 동의 없이 DJ의 브레이크 구간에 난대없이 튀어나오는 댄스 그룹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클럽 출입이 제한되었다. 결국 거리로 향해 다른 비보이팀과 댄스 대결을 벌이는 것이 그들의 문화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에 들여온 붐박스로 비보이들의 길거리 댄스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 이후로 약간 마이너 장르가 되고 있었지만, 1990년대에 다시 파워풀한 비보잉이 등장하면서, 미국이란 국가적 틀을 벗어나 전세계적인 유행을 끌었다.
그라피티 (Graffiti)
그라피티는 건물의 벽이나 시설물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쓴 글씨나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범법 행위 중 하나지만, 지금은 예술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Graffiti는 이탈리아어로 그냥 낙서라는 의미다.
1960년대 중반 필라델피아 흑인 소년의 낙서로 이 문화가 시작되었는데, 이후 그라피티는 정치사회적인 구호를 나타내거나 갱단들의 구역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됐다. 시의 경찰들도 누가 이 낙서를 했는지 알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분노 표현 중 하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뉴욕에서도 그라피티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DJ와 MC는 이 그라피티가 그려진 야외에서 파티를 주최하곤 했다. 5년만에 다른 지역에서까지 유행을 시킨 정도면, 꽤나 파급력이 컸던 것 같다.
한국 힙합
한국에서는 미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 (인종차별주의, 백인우월주의)을 바탕으로 한 '미국적인' 음악 장르인 힙합을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흑인들, 노동자 계층, 화이트 컬러 집단이 힙합을 시작했지만, 한국에서 힙합을 시작한 1세대 한국 힙합 아티스트들은 강남의 중산층 자제들이 많았다. 교육열이 강한 강남에서 자란 젊은 층이, 학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적막한 도서관에서의 생활 속에서 자유분방한 힙합에 매력을 느낀 것일지도. 아티스들의 가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을 이 사회에서 억누르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과 불평, 무엇이 그들에게 박탈감을 주는지도 엿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간접 경험을 시켜주는 장르라고도 볼 수 있다.
1997년 힙합 레이블인 마스터플랜은 홍대에서 라이브 클럽을 운영했다. 한국 힙합의 1세대 아티스트들은 모두 이곳에서 성장했다고 보면 된다. 나중에 이 힙합 레이블은 양현석이 운영하는 클럽에 의해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힙합 커뮤니티 또한 언더그라운드에서 많은 글과 댓글이 오고갔다. 거기서 사람들은 친목을 쌓기도 했으며, 팀을 결성하기도 했으며, 힙합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다. 지금도 힙합 커뮤니티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글이 올라온다. (특히 쇼미더머니 시즌 때는 난리난다.)
힙합의 미래
힙합이란 장르, 특히 랩이라는 음악 장르는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중후반에 컴퓨터 CPU, 메모리의 한계로 음악 기기에는 작은 용량의 조각조각으로 된 오디오 파일만 넣을 수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조각조각으로 된 드럼 사운드가 주로 기기 안에 들어갔다. 자연스레 드럼 머신들이 음악 장르에서 주류로 사용되면서 드럼을 사용한 분야도 같이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의 보급률까지 높아지고, 값도 몇배로 싸졌다. 요즘엔 데스크탑 하나로 근사한 음악까지 만들 수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요즘엔 핸드폰으로도 고퀄리티 드럼 비트를 짤 수 있다. -Garage band ios)
랩 장르가 컴퓨터 기술과 함께 발전해왔기 때문에, 꾸준히 컴퓨터가 발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장르도 그와 같이 계속 발전해 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컴퓨터 소프트웨어에서 새로운 기능이 업데이트 될 때마다, 그 기능을 활용한 아티스트들의 곡들이 대거 나오기도 한다. 이는 기술의 발전이 아티스트들에게도 끊임없는 영감을 준다는 의미이며, 끊임없는 영감은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이어지고, 그런 실험정신은 한 분야에 발전을 계속 이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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